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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1000년 사직의 왕성인 경주 월성 주변에서 확인된 명문 석비편. 그중 1976년 월성 동북쪽 도로변에서 수습된 명문비편은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1937년 및 2020년 수습된 명문 비석편은 주목받지 못한 채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었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경주 월성은 신라 1000년 사직을 지켜온 신라의 도성이다. <삼국사기>는 “101년 탈해왕의 뒤를 이은 파사왕(재위 80~112)이 이곳에 성을 쌓고 옮겨 살았다”(‘본기·파사왕’조)고 했다. 이것은 후대(고려) 사가(김부식 등)의 기록(<삼국사기>)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사람들이 쓴 생생한 육필 증언은 없을까. 있다. 신라인들이 남긴 명문 석비가 셋이나 있다. 그러나 셋 다 조각으로 남아있다.
월성 인근에서 수습된 명문 비편 두 .
그중 첫 번째가 ‘1937년(소화12) 6월27일 서월성지’에서 수습된 명문 비편(비석 조각)이다. 발견자는 일제강.기~해방전후 사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근무했던 최남주였다. 유물대장엔 ‘출토지=경주 교리’라 했다. 이 비편은 줄곧 국립중앙박물관의 e뮤지엄 웹사이트에 ‘비편(월성지)’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누구나 검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편이 작은 데다(가로 13.62㎝×세로 11.13㎝, 두께 9.75㎝, 무게 약 1.23㎏) 글자도 4~5자 정도 판독될 뿐이었다. 그런 탓인지 수습된 지 80년이 넘도록 관심을 끌지 못한 채 국립경주박물관 수장고에 갇혀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가 2024년 8월 월성 해자 보고서를 쓰려고 2020년 월성 해자 진입로 동편의 배수로 아래 교란층에서 수습한 명문 비석편을 임시 수장고에서 꺼내 전문가 자문회의를 열었다. 이 자문회의에서 고구려풍의 서체를 확인했다. 또 비석편이 1937년 수습 이후 80여 년간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있던 비석편과 같은 짝이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두 비석편을 합체하자 ‘칭(稱)’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기환 제공
또 하나의 명문 비석 조각이 1976년 월성의 동북쪽에 있던 인왕파출소(현 신라왕궁영상관) 앞 도로 주변에 발견됐다. 이 비석편은 18자 정도가 판독 가능했다. 연구결과 (통일) 신라 시대에 조성된 비석으로 추정됐다. 우선 글씨가 해서체(정자로 쓴 서체)였다. 6세기 이후 조성된 포항 중성리비(501)-포항 냉수리비(503)-울진 봉평비(524) 등 신라비가 모두 해서체다. 또 ‘급벌차(及伐車·7세기 후반)-작인(作人·6세기 후엽)-나말(奈末·6세기 중엽~8세기대)’ 등의 용어는 이 비석의 연대를 추론할 수 있다. 어떤 연구자는 7세기 후엽 쯤 월성 해자를 석축 호안(토사 유출 등을 막으려고 돌로 쌓는 구조물)을 개축한 기념비일 수 있다는 추론을 내놓았다.(장기명 국립서울문화유산연구소 학예사) 결국 ‘1937년 수습 비편’은 무관심 속에 묻혔고, ‘1976년 수습 비편’은 ‘(통일) 신라시대의 기념비’ 정도로 자리매김했다.
1937년 및 2020년 월성 수습 비석편을 합체한 ‘월성비’는 총 16자(혹은 17자) 중 11자 정도가 판독 가능했다. 기경량 가톨릭대 교수는 ‘월성비’의 명문을 “‘萬(年)…存(社)…稱(天)…궤白天…(系)貢不(闕)…(無)渡’(만년…사직을 보존하고…天…을 칭하고…무릎을 꿇고 天…께 아뢰니…를 잡아매고 조공을 거르지 않고…를 건너지 못하다…”고 했고 해석했다. 이기환 제공
웬 고구려풍 글씨?
그러던 2020년 12월11일이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조사단은 월성 해자 진입로 동편의 배수로 아래 교란층에서 또 한 .의 명문 비편을 수습했다. 명문 비편은 가장 넓은 곳 기준으로 가로 16.47㎝×세로 16.58㎝였고, 무게는 약 2.7kg 정도였다. 그런데 그 글자들은 그동안 확인된 신라 비석의 서체(해서체)와는 사뭇 다른 서체(예서)였다. 자연스레 월성과는 관계가 먼, 시대가 한참 떨어지는 명문 비석으로 치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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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지어 9세기 이후 고려시대까지 내려갈 수 있다는 판단도 있었다. 무엇보다 ‘2020년’ 비편은 교란층에서 수습했고, ‘1937년’ 비편 또한 출처가 불분명한 유물이었다. 고고학적인 맥락을 알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이 명문 비편도 별다른 흥취를 풍기지 못한 채 연구소 수장고(신라월성연구센터)로 직행했다.
937년과 2020년 경주 월성 서편에서 수습된 명문 비편(비석 조각). ‘월성비’에 반으로 잘려있지만 ‘궤(?)’로 읽히는 글자가 있다. 이 ‘궤’자는 광개토대왕비와 충주 고구려비 등에 등장한다. 월성비에 나오는 ‘궤’ 자에 이어 읽으면 ‘…궤백천(?白天)…’이다. 이 비석의 연대와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국립경주문화연구소 제공·고광의 연구자 설명
그러던 2024년 8월20일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는 월성 해자 발굴 보고서를 쓰기 위해 ‘2020년 비편’을 꺼내 전문가 자문회의를 열었다. 이날 일찍 도착한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은 비편의 명문을 본 순간 깜짝 놀랐다. 대번에 광개토대왕비문의 서풍과 흡사한 고구려계 금석문으로 판단했다. 그중 비교적 명료하게 남아있는 ‘백(白)’, ‘천(天)’, ‘공(貢)’, ‘불(不)’자가 쉽게 판독됐다. 특히 ‘공(貢)’자와 ‘불(不)’자의 결구가 광개토태왕비의 자형과 완전한 서체적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겼다. 고 위원의 판독은 이날 오후 열린 자문회의에서도 실물 비편과 함께 공유되었다.
에 따르면 ‘무릎을 꿇고 절하는’ 궤배는 고구려 특유의 인사법이었다. 특히 무릎을 꿇을 때는 한쪽 다리를 폈다고 한다. 이기환 제공"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610/16/weeklykh/08100ejii.png" data-org-width="1200" dmcf-mid="2YhCHs2uy4"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10/16/weeklykh/08100ejii.png" width="658">
<삼국지>에 따르면 ‘무릎을 꿇고 절하는’ 궤배는 고구려 특유의 인사법이었다. 특히 무릎을 꿇을 때는 한쪽 다리를 폈다고 한다. 이기환 제공
그 과정에서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김동하 연구소 주무관이 ‘2020년 비편’을 보고 “비슷한 서체의 비편을 박물관 사이트(e뮤지엄)에서 본 적이 있다”고 운을 뗀 것이었다. 눈썰미 좋은 김동하 주무관이 보았다는 유물은 다름 아닌 ‘1937년 비편’이었다. 연구소 측은 국립경주박물관 수장고로 달려가 ‘2020년 비편’과 ‘1937년 비편’을 맞춰보았다. 그랬더니 기가 막히게 합체되었다. 서체 또한 같았다.
무엇보다 ‘1937년 비편’에서 잘려져 있던 글씨가 ‘2020년 비편’과 맞춰보니 완전한 한 글자로 거듭났다. ‘칭(稱)’자 였다.(전경효 연구자) 합체된 비편의 전체 크기는 가로 27.19㎝, 세로 16.58㎝, 두께 9.75㎝에 이르렀다. 서체는 예서(가로가 길고 세로가 짧은 장방형의 서체)였다. 석재의 재질은 두 조각 모두 경주 남산 일대의 화강암으로 판명됐다.(이후 이 합체된 비석을 ‘월성비’로 통칭한다.)
광개토대왕 등 고구려비에서는 고구려 임금을 ‘하늘’로 비유하는 표현이 많다, ‘천제지자’니 ‘황천지자’니 하는 표현이 그것이다. 따라서 ‘월성비’의 ‘궤백천’은 ‘(신라왕이) 무릎을 꿇고(?) 고구려 태왕(天)께 아뢴다(白)’는 의미일 수 있다. 이기환
신라에는 없는 글자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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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심장부인 도성(월성) 인근에서 왜 고구려계 비석이 발견되었다는 건가. 혹시 이 ‘월성비’는 신라인이 제작한 비석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우선 발견된 비편은 2.뿐이다. 거기서 6행 16자(혹은 17자)가 확인되지만 판독된 글자는 11개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떻게 ‘고구려비’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섣부르지 않은가. 또 서체가 광개토대왕비문, 충주 고구려비문, 경주 호우총 출토 명문 청동그릇 등 고구려 유물과 비슷하긴 하다.
광개토대왕비와 충주 고구려비를 종합해보면 고구려는 ‘전쟁을 통해(광개토대왕비) 백제를, 외교를 통해(충주 고구려비) 신라’의 무릎을 끓렸다. 이기환 제공
그러나 실제 글자 형태가 다른 부분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월성비’는 고구려 서체의 영향을 받은 신라인의 작품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일리있는 반박이다. 하지만 비문의 글자체와 그 내용을 살펴보라. 아무리 봐도 ‘고구려비’가 떠오른다. 무엇보다 ‘월성비’에 보이는 여러 글자, 예컨대 사(社)·칭(稱)’·공(貢)·도(渡) 등은 6세기 ‘신라 비’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반면 비편의 존(存), 칭(稱), 백(白), 불(不), 공(貢), 천(天). 궤(跪) 등의 글자는 광개토대왕비문(414) 등 4~5세기 여러 고구려비를 연상하게 된다. 광개토대왕비에 등장(도해·渡海)하는 ‘도(渡)’와 흡사한 글자도 보인다. 광개토대왕비의 ‘락(樂)’과 아랫부분이 비슷한 글자도 있다.
‘…貢不(問)…’ 이중 ‘공불(貢不)’은 ‘조공을 왜 바치지 않냐. 빨리 바치라’는 고압적인 하교로도 읽힐 수 있다. 이것을 ‘공불궐(貢不闕)’로 읽어서 ‘조공을 거르지 않는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기환 제공
무릎 꿇어 충성
이 ‘월성비’에서 판독 가능한, 혹은 추독할 수 이는 글자들을 토대로 문장으로 풀어본 연구자가 있다. “‘萬(年)…存(社)…稱(天)…跪白天…(系)貢不(闕)…(無)渡’(만년…사직을 보존하고…天…을 칭하고…무릎을 꿇고 天…께 아뢰니…를 잡아매고 조공을 거르지 않고…를 건너지 못하다…”(기경량 가톨릭대 교수)
무슨 암호문 같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 광개토대왕비문과 충주 고구려비문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재위 412~491)이 서거한 부왕(광개토대왕 재위 391~412)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비석이다.(414) 또 충주 고구려비는 397년(혹은 449년?) 고구려가 남진 정책으로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한 뒤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이 두 비석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글자가 있다. ‘꿇어앉을 궤(跪)’자이다. 우선 광개토대왕비를 보자.
월성비에 새겨진 ‘존사(存社)’는 ‘사직을 보존한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기환 제공
“396년 광개토대왕이…아리수 건너 성을…공격하니 백제왕(아신왕·392~405)이…왕 앞에 꿇어앉아(궤왕)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이때 고구려 왕 앞에 굴복한다는 뜻으로 ‘궤왕’이 쓰였다. 광개토대왕비뿐이 아니다. 충주 고구려비에는 ‘궤(跪)’자가 두 번 나온다. “397년(449년?) 5월 고려 태왕이 신라 매금(내물왕?·356~402)과 형제관계를 맺으려고 궤영(跪營)에 이르렀다…고구려 태자가 궤영에서 신라 왕과 신하들에게 의복 등 갖가지 물품을 하사했다.”
여기서 ‘궤영’은 당시 고구려가 천자-제후, 혹은 형-동생 관계를 다지는 이벤트를 위해 충주에 마련한 군영(임시 외교공간)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신라왕에게 “고구려 태자에게 무릎을 꿇는 예를 올리라”고 요구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고구려는 백제는 전쟁을 통해(광개토대왕비), 신라는 외교를 통해(충주 고구려비) 천자-제후 관계를 맺도록 강요했다. “무릎 꿇으라”면서….
왜 신라의 왕성(월성) 주변에 고구려비가 서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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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대형 사건은 400년 고구려군이 지원군을 보내 신라 도성에 쳐들어온 왜와 가야연합군을 물리친 ‘고구려의 신라구원전쟁’이다. 이기환 제공
그런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궤(跪)’는 고구려 특유의 예법이었다. 그러니 ‘궤(跪)’는 신라·백제 등 다른 삼국시대 문자 자료에서는 찾을 수 없는 글자다. 그런데 이번 ‘월성비’에 반으로 잘린 채 확인됐지만 연구자들이 ‘궤’로 읽는 글자가 보인다. 이어 읽으면 ‘…궤백천(跪白天)…’이다. 여기서 ‘백(白)’자는 ‘아뢰다’는 뜻이 있다. ‘천(天)’자는 당연히 ‘하늘’의 뜻도 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비 등에서 ‘천제의 아들(天帝之子)’ 혹은 ‘하느님의 아들’(皇天之子)처럼 ‘고구려 왕’의 높임말로 쓰였다.
그러니 ‘궤백천’은 ‘(신라왕이) 무릎을 꿇고(跪) 고구려 태왕(天)께 아뢴다(白)’는 의미일 수 있다. 그렇다면 ‘궤백천’은 정형화된 일종의 고구려 공문서식 표현으로 해석된다. 월성비에는 ‘하늘(태왕)을 칭한다’는 뜻의 ‘칭천(稱天)’자도 보인다.
월성비는 고구려가 위기에 빠진 신라를 구원해준 뒤에 세운 공덕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기환 제공
“조공 바치라!”
이 월성비에는 이외에도 4~5세기 고구려-신라 간 수직적인 주종 관계를 암시하는 단어가 눈에 띈다. ‘…貢不(問)…’ ‘…存(社)…’, ‘…염渡…’자 등이다. 이중 ‘공불(貢不)의 조합은 조공 의무와 직결된다. 이는 신라가 조공 의무를 불이행한 것에 대한 고구려의 책망, 향후 조공을 거르지 말라는 식의 고압적인 하교일 가능성이 있다. 이 ‘…貢不(問)…’ 부분을 ‘貢不(闕)’로 읽어서 ‘조공을 거르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연구자도 있다. 또 ‘存(社)’는 ‘사직을 보존한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하나같이 뚜렷한 상하관계를 암시하는 어휘들이다.(고광의·기경량 연구자)
기경량 연구자의 설명에 따르면 월성비에 새겨진 ‘무도(無渡)’는 ‘(왜가)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했다’, 혹은 ‘바다를 건너 되돌아간 이가 없다’는 식으로 읽을 수 있다. 이기환 제공
그렇다면 왜 신라의 왕성(월성) 주변에 그렇게 고압적인 고구려비가 서 있었던 걸까. 어떤 이는 월성비에 새겨진 ‘(無)渡’, 즉 ‘(무)도’ 글자에 주목한다. 이 구절은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했다’, 혹은 ‘바다를 건너 되돌아간 이가 없다’는 식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기경량 연구자) 그 경우 떠오르는 대형 사건이 있다. 바로 400년에 벌어진 고구려군의 신라 구원 전쟁이다. “400년(광개토대왕 10년) 보·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했다…신라성(월성)에 들어가니…왜인이 가득 찼는데 관군이 막 도착하자 왜적이 물러났다…신라 임금이…고구려왕(호태왕)에게 조공했다…”(<광개토대왕비문>)
이 해석이 맞는다면 ‘월성비’는 400년 이후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돌아온 실성왕이 즉위한 402년 직후나 눌지왕이 역시 고구려의 지원으로 실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417년 직후를 주목하는 연구가 있다. 이기환 제공
그렇다면 고구려가 위기에 빠진 신라를 구원해준 뒤에 세운 공덕비가 아닐까. 남산에서 가져온 석재를 갈고 다듬어 당대 고구려의 공식 필체였던 이른바 ‘광개토대왕체’로 한껏 멋을 내어….(고광의 연구자) 그렇다면 월성비의 ‘무도(無渡)’는 고구려군이 왜군을 모두 소탕했기에 ‘바다를 건너지 못하겠다’ 혹은 ‘바다를 건너 되돌아간 자가 없었다’는 식으로 표현했을 수 있다.(기경량 연구자) 이 해석이 맞는다면 ‘월성비’는 400년 이후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떤 연구자는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돌아온 실성왕(402~417)이 즉위한 402년을 주목하기도 한다. 혹은 눌지왕(417~458)이 역시 고구려의 지원으로 실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417년 직후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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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비편 2. 모두 교란층에서 수습된 터라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 폐기·수습된 곳에서 가까운 곳을 찾아보라면 역시 월성 서쪽 방면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월정교~첨성대~월성으로 주변 시선에 가장 잘 보이는 루트이다.(장기명 연구자)
‘월성비’ 두 비편은 10~16㎝ 크기로 잘게 파괴된 채 수습됐다. 비면은 매끄럽고 필획도 또렷했다. 두 비편의 접합면이 틈 없이 완벽하게 맞물렸다. 뭔가 단단한 도구로 깨뜨린 흔적이 역력하다. 이기환 제공
‘신라판 삼전도비문’
여기서 또 하나 쉬 넘길 수 없는 대목이 있다. 고구려 .령군이 세운 것으로 보이는 ‘월성비’는 언제 폐기되었을까. 여기서 교란층에서 수습된 두 비편의 양상을 살펴보자. 두 비편은 10~16㎝ 크기로 잘게 파괴된 채 수습됐다. 그렇지만 비면은 매끄럽고 필획도 또렷했다. 특히 두 비편의 접합면이 틈 없이 완벽하게 맞물렸다. 단단한 도구로 집중 타격된 결과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언제, 누가 이 ‘월성비’를 파괴했을까.
이 대목은 고고학적인 상상의 영역이다. 따지고 보면 왕도의 한복판에 서 있는 ‘월성비’는 신라 처지에서 보면 치욕의 기념물이었다. 고구려의 지원으로 누란의 위기에서 탈출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외세를 끌어들인 대가는 굴욕 그 자체였다. 고구려의 내정간섭은 실성왕과 눌지왕 등 2대에 걸친 왕위 계승에까지 미쳤다. 그런 상황에서 속국의 처지에서 고구려 。령군의 치하에서 강요된 ‘월성비’는 한마디로 ‘신라판 삼전도비’였을 것이다. 신라인들은 월성 입구(혹은 주변)에 우뚝 서 있었을 월성비를 바라보며 심한 굴욕감과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고광의 연구자)
신라는 고구려의 지원으로 위기를 넘겼지만(400) 그 후 50여 년간 고구려의 속국처럼 지냈다. 신라는 450년 7월 강릉 성주 삼직이 삼척에서 사냥 중이던 고구려 장수를 죽인 사건을 계기로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기환 제공
수탉 사냥 사건의 전모
그러다가 고구려의 속박을 벗어날 기회가 왔다. 때는 바야흐로 450년(눌지왕 34) 7월 하슬라(강릉) 성주 삼직이 실직(삼척)에서 사냥하던 고구려 변장 장수를 공격하여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고구려왕이 분기탱천, 신라의 변경을 침략했다가 신라왕의 사과를 듣고 물러났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군사도발로 고구려를 시험한 신라는 결정적인 사건을 터뜨린다. 이것이 바로 ‘수탉 사냥’ 사건이다.
<일본서기>에 아주 자세히 등장한다. 464년(자비왕 7) 2월 신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병사가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따라나선 신라인에게 “너희 나라(신라)는 우리나라(고구려)에게 망할 날이 머지않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신라 자비왕은 “고구려가 신라를 돕는 것이 아니라 병탄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여겼다. 자비왕은 전국에 비밀리에 급보를 내려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모두 잡아 죽여라”고 지시했다.
. 464년 신라 자비왕이 “집안(신라)의 수탉(고구려군)을 모두 죽이라”는 밀명을 내렸다. 이 말뜻을 알아차린 신라백성들이 고구려 주둔군을 공격하여 몰살시켰다. 이때부터 양국관계은 파탄 났다. 이기환 제공"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610/16/weeklykh/24248ifyb.png" data-org-width="1200" dmcf-mid="YBo7Hs2uTu"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10/16/weeklykh/24248ifyb.png" width="658">
고구려-신라 관계를 파탄 낸 수탉사냥 사건을 기술한 <일본서기>. 464년 신라 자비왕이 “집안(신라)의 수탉(고구려군)을 모두 죽이라”는 밀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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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말뜻을 알아차린 신라백성들이 고구려 주둔군을 공격하여 몰살시켰다. 이때부터 양국관계은 파탄 났다. 이기환 제공
당시 고구려군은 모자에 새 깃털을 꽂는 특유의 조우관을 썼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고구려군을 ‘수탉’이라 불렀다. 왕의 지시를 알아차린 신라인들은 영토 내에 흩어져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인들을 일제히 기습하여 모조리 몰살시켰다. 이 ‘수탉 사냥’ 직후 신라 내의 고구려 세력은 완전히 축출되었다. 파탄 난 양국 관계는 전면적인 전쟁 상태로 돌입했다.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월성 주변에 우뚝 서서 신라의 복속과 조공을 강요하던 고구려비는 ‘수탉 사냥’과 함께 산산이 조각나 폐기되었을 것이다. 맞는다면 이 ‘월성비’의 두 조각은 고구려 。령군에 맞선 신라인들의 주권 회복 운동이자 선언의 상징물일 수 있다. 그런 예는 또 있다. 3세기 중엽 위나라 관구검이 환도성을 함락하고 세운 기공비가 조각난 채 발견됐다. 또 최근 보고된 백암성비편의 형태를 파손의 흔적이 역력하다. 굴욕의 상징물이었던 ‘삼전도비’는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1895년 청일전쟁 직후, 1956년 한국전쟁 직후 땅속에 묻히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고광의 연구자)
당시 고구려인 모자에 새 깃털을 꽂는 조우관을 썼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고구려군을 ‘수탉’이라는 은어로 불렀다. 이 ‘수탉 사냥’ 직후 신라 내의 고구려 세력은 완전히 축출되었다. 이기환 제공
‘월성 고구려비’인가
어떠한가. 두 조각 합친 크기라봐야 16㎝를 넘지 않고 글자도 불과 11자 판독 가능한 명문비편이 아닌가. 그런 마당에 너무 발칙한 스토리텔링이 아닌가.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역사의 조각으로 엮어본 고고학적 상상이 아닌가. 천생 기자를 자처하는 필자는 ‘월성비’에 국적(‘월성 고구려비’)을 부여하지 않겠다. 그 분야에 천착한 연구자들은 평생 공부한 깜냥으로 이렇다 저렇다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연구자는 과감하게 ‘월성 고구려비’라 했다. 기자는 그렇게까지는 나가지 않겠다.
월성 주변에 우똑 서서 신라의 복속과 조공을 강요하던 고구려비는 ‘수탉 사냥’과 함께 산산이 조각나 폐기되었을 것이다. 맞는다면 이 ‘월성비’의 두 조각은 고구려 .령군에 맞선 신라인들의 주권 회복 운동이자 선언의 상징물일 수 있다. 이기환 제공
만약 ‘월성비=신라비’임을 논증할 ‘신박한’ 논문이나 글이 있다면 언제든 소개해주겠다. 신라비임을 증명할 또 다른 석비편이 어느 곳에서 홀연히 나올 수도 있겠다. 그때 가서 이 글이 ‘가짜뉴스’로 처리되어도 좋다. (이 기사를 위해 고광의·장기명·전경효·이현태 연구자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기경량 선생의 논문이 기사 전개에 큰 도움이 되었고, 박대재 선생이 참고 논문을 보내주었습니다. 이용현 선생의 SNS 분석도 기사 방향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참고자료>
고광의, ‘ 경주 월성 서편 수습 비편의 서체와 역사적 의의’, <‘월성 서편 수습 비편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학술대회 자료집>,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2026
기경량, ‘ 경주 월성 서편 수습 비편의 판독과 고구려와의 연관성’, <‘월성 서편 수습 비편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학술대회 자료집>,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2026
이재환·이현태·정현숙, <‘월성 서편 수습 비편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학술대회 자료집>,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2026
장기명, ‘월성 출토 추정 고구려비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 <영남고고학> 제104호, 영남고고학회, 2026
전경효, ‘월성 서편 수습 비편에 대한 기초적 검토’, <경주 월성 서편 수습 비편 전문가 포럼 자료집>, 국립경주박물관·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2026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월성 해자 발굴 조사 보고서 VI > 2권, 2024
박대재, ‘중국 요령성 등탑시 백암성 출토 고구려 비편’, <한국 고대사 탐구> 94권, 한국고대사학회, 2019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奈末·6세기 중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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